뮤지컬을 낯설게 느끼는 사람은 대개 같은 지점에서 멈춘다. 대사는 현실처럼 들리는데, 어느 순간 인물이 갑자기 노래를 시작하면 약속이 깨진 듯한 기분이 든다는 것이다. 그 어색함은 감수성의 부족에서 생기지 않는다. 아직 무대의 문법을 번역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생기는 감각의 시차에 가깝다. 그 시차가 사라지는 순간, 뮤지컬은 비현실적인 장르가 아니라 말보다 정교하게 인간의 결정을 드러내는 장르로 보이기 시작한다.
말은 보통 정보를 곧게 운반한다. 누가 무엇을 원하고, 어떤 일이 벌어졌으며, 지금 무엇이 문제인지 빠르게 정리하는 데 적합하다. 노래는 다른 일을 맡는다. 말이 한 줄로 흘러갈 때, 노래는 같은 감정 안에 들어 있는 망설임, 모순, 과잉, 미련, 환상을 한꺼번에 세운다. 대사로는 한 번 말하고 지나갈 수밖에 없는 것을, 노래는 반복하고 흔들고 길게 붙들면서 인물의 속도를 관객이 몸으로 따라가게 만든다. 그래서 뮤지컬에서 노래는 종종 장식이 아니라 압력의 증거가 된다.
브로드웨이 연출가 바틀릿 셰어는 뮤지컬이 될 만한 이야기를 두고 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자리가 있어야 한다는 취지로 설명한 적이 있다. 이 문장은 장르의 핵심을 매우 정확하게 짚는다. 감정이 크기만 하다고 노래가 되는 것은 아니다. 말이 처리할 수 없는 종류의 감정과 선택이 있을 때, 인물은 선형적인 언어에서 이탈한다. 사랑 고백이 모두 노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욕망과 두려움과 상실 예감까지 동시에 불러낼 때 노래가 된다. 슬픔이 모두 발라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슬픔이 사건의 결과를 바꾸거나 인물을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버릴 때 노래가 된다.
이 원리는 화려한 대극장 작품에서만 통하는 것이 아니다.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처럼 두 대의 헬퍼봇이 서로의 방 문턱을 넘는 이야기도, 〈빨래〉처럼 서울의 골목과 옥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하루를 붙드는 이야기도, 결국은 말보다 더 넓은 그릇이 필요한 순간을 노래에 맡긴다. 겉보기에는 규모도 다르고 온도도 다르다. 하나는 가까운 미래의 서울을 배경으로 한 소극장 감수성의 작품이고, 다른 하나는 20년 넘게 관객을 만나며 130만 명과 6,000회 이상의 공연을 기록한 생활 밀착형 스테디셀러이다. 그런데 둘 다 관객의 기억에 남는 이유는 멜로디가 아름다워서만이 아니라, 노래가 인물의 삶을 밀어 앞으로 내보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