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린 침략의 서Lebor Gabála Érenn』는 켈트 신화를 연구하는 데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문헌으로, 신화학자는 물론 켈트 신화 애호가 사이에서도 널리 알려진 고전이다. 영어로는 20세기 이전부터 다수의 번역과 깊은 연구가 이루어졌기에 한국의 연구자 역시 영역본을 통하여 이 문헌을 접할 수 있었다.
현전하는 켈트 신화는 웨일스를 중심으로 한 브리튼 계통과 아일랜드를 중심으로 한 게일 계통의 두 갈래로 나뉜다. 『에린 침략의 서』는 후자, 곧 게일 전승의 정수이자 아일랜드 문학사의 걸작으로 평가된다. 10세기경부터 수백 년에 걸쳐 아일랜드 각지의 기독교 수도사의 손을 거치며 개수된 이 고서는 주로 구전으로 전해지던 게일인의 신화적 화소를 역사서의 형식으로 집성하고 기독교적 세계관을 접목하여 중근세 아일랜드의 지적·영적 전통을 집약한 기념비적 저작이다.
『에린 침략의 서』의 서사는 크게 일곱 장으로 나눌 수 있다. 제1장부터 제4장까지는 고대 아일랜드에 차례로 도래한 네 민족의 역사를 다루며, 제5장은 “투아하 데 다난”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기독교 이전 아일랜드의 신족神族 전승을 역사의 형식을 빌려 재구성한다. 제6장은 아일랜드인의 가상의 선조 “밀의 아이들”의 초기사를 성서적 계보와 결부하여 정통성을 부여하고, 제7장은 밀의 아이들의 침략과 기나긴 역대 왕사를 서술한다.
『에린 침략의 서』는 근대에 이르기까지 진실한 역사서로 통하였지만 현대의 학술적 관점에서 보면 사료로서의 가치가 거의 없는 창작 소설이자 위서임이 틀림없다. 또 게일 전통의 가치를 폄하하고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덮어씌우고자 하는 『에린 침략의 서』 저자의 노골적인 의도가 켈트 신화의 원형을 심대하게 훼손하였다는 비판 또한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구전에 머물러 실전의 위기에 몰린 게일 전통 문학을 문자와 기록의 영역으로 이끌어낸 『에린 침략의 서』의 진가는 이 모든 한계를 억누를 만큼 위대하다. 이 “위서”의 공헌이 없었다면 오늘날 전해지는 아일랜드의 귀중한 유산은 외침과 환난의 역사에 묻혀 망각 저편으로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본서는 『에린 침략의 서』의 최초 한국어 편역본이다. 『에린 침략의 서』 연구에 중대한 한 획을 그은 1941년의 로버트 매컬리스터Robert Macalister 대역본을 참조하고 『에린 침략의 서』 계열의 주요 문헌을 적극 인용·교감하였다. 또 중세 문헌 특유의 난해하고 정합이 어긋난 서술을 근대적인 문체로 교정하였으며, 서사를 이해하는 데에 필요하다고 판단한 경우에는 원전을 훼손하지 않는 최소한의 가필로 보완하였다. 또 원서의 독자가 게일어와 게일 문화·역사에 해박한 식자였음을 고려하여 현대 독자의 이해를 돕는 200개 이상의 주해를 덧붙였다.
책 말미에는 올버니 대학University at Albany에서 인류학을 공부한 양흥태 박사의 『에린 침략의 서』 해제를 수록하였다. 본고는 『에린 침략의 서』의 역사적·문화적 의의를 세계사적 흐름에서 설명한다. 많은 켈트 신화 애호가 여러분께서 품고 계실 “켈트 신화는 기독교에 오염되었는가?” 라는 의문에 이 해제가 제공하는 현대 고고학자들의 합의된 해답이 열쇠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