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붕당사를 다시 써야 할 만큼 흥미로운 혼맥!
노론 영수 송시열, 소론 영수 윤증, ‘사문난적’으로 처형된 남인 대표 윤휴는 남인의 대표 산림 권시를 중심으로 맺어진 인척이었다
격심한 당쟁 속에서 의연히 실사구시 관인의 길을 가며 최고의 재정 행정가(호조판서)가 된 권이진의 삶을 발굴 복원하다
부록: 〈열하일기〉보다 56년 앞선 〈연행일기〉
오늘 우리 역사에서 귀감이 될 새로운 인물을 발굴 소개한다. 조선 영조 때 호조판서를 지낸 유회당 권이진이다.
원광대 유명종 교수는 “성호 이익이 묘지명을 짓고 번암 채제공이 시장을 올린 것으로 보아 그의 학통과 사상이 유학사상사 전회(轉回)의 한 기틀을 마련한 것으로 생각된다”며 유학자로서 권이진을 높이 평가하였다. 하지만 그가 더욱 주목되는 점은 뛰어난 행정가, 실사구시 관인으로서의 면모다.
권이진은 2년밖에 안되는 짧은 재임 기간에도 불구하고 나라의 곳간을 가득 채우는 성과를 이뤄냄으로써 훗날 영조도 그를 최고의 호조판서로 평가하였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양란과 기후재해로 황폐화되었던 경제가 점차 회복되고는 있었지만 지속되는 비리와 부실한 재정 관리로 인해 당시 국가 재정은 파탄 직전이었다. 권이진이 얼마나 재정 건실화에 노력했는지는 영조가 사랑스런 옹주에게 은주발을 선물하려 한 것까지 명분 없는 지출이라며 완강히 반대한 에피소드에서 일단을 엿볼 수 있다. 권이진은 세금을 더 거두어들이는 방식이 아니라 근대적이고 합리적인 재정원칙을 수립하고, 낭비를 줄이고, 비리를 척결함으로써 개혁의 성과를 이루어냈다.
훗날 정조의 개혁정치를 보좌하며 최고의 영의정으로 칭송된 채제공은 자신이 호조판서를 맡게 되자 조정의 경대부들이 서로 “그대가 반드시 권판서와 같기를 바라오”라고 했다며 “공께서 40여 년 전에 호조판서를 지냈는데도 불구하고 다스린 법과 시행했던 일들이 혁혁하게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고 회고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도 흥미로운 기록이 실려 있다. 탐관오리의 비리를 징치한 것으로 유명한 어사 박문수가 호조판서를 맡았을 때 좋은 평판을 받았으나 ‘권이진이 호조에 있으면서 재화를 잘 다스린 것으로 최고의 칭예를 얻은 것에는 미치지 못하였다’는 대목이다.
권이진의 정책을 면밀히 연구한 역사학자들도 이러한 평가에 동의하고 있다. 충남대 성봉현 교수는 〈유회당 권이진의 호조재정 확보책〉이라는 논문에서 ‘권이진을 조선 최고의 호조판서로 평가’하였으며, 김준석 연세대 교수도 권이진이 ‘그 시기 재정운용의 최고 능력가라는 평판’을 얻었다고 평했다.
노론이 주도하던 당시 정치구도 속에서 권이진은 극소수파인 남인 출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호조판서로 전격 발탁된 데는 무엇보다 그의 탁월한 능력과 정파에 휘둘리지 않고 실사구시적 올곧음을 추구하던 사람됨이 영조의 눈에 띄었기 때문일 것이다.
권이진 집안의 혼맥 및 그에서 파생한 인간관계는 조선 붕당사를 통틀어 가장 흥미로운 대목이기도 하다. 그의 외조부는 노론의 영수인 우암 송시열이고, 고모부이자 스승 윤증은 소론의 영수이다. 사문난적으로 처형된 남인 대표 윤휴의 아들 윤의제 역시 고모부였다. 권이진의 할아버지 권시를 중심으로 당시 붕당의 대표 인물들을 망라하는 놀라운 인연이 형성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