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까지만 해도 나는 반도체 산업을 남의 이야기로만 여겼다. 뉴스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실적이 나올 때마다 숫자만 눈으로 훑고 지나갔을 뿐, 그 숫자 뒤에 어떤 힘의 관계가 숨어 있는지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 팀 쿡이 카메라 앞에서 "100년 만의 홍수 같은 사태"라는 말을 꺼내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세계에서 가장 힘이 센 기업의 수장이, 그것도 15년 넘게 애플을 이끌어온 사람이, 왜 이렇게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부품 가격 이야기를 해야 했을까.
답을 찾아가다 보니 뜻밖의 사실과 마주하게 되었다. 애플은 한때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가장 무서운 손님이었다. 대량 주문을 미끼로 던져놓고 정작 물건이 완성되면 값을 깎거나 발을 빼는 방식으로, 삼성과 SK하이닉스, 마이크론 같은 제조사들을 벼랑 끝까지 몰아붙인 적이 있었다. 그 여파로 반도체 기업들이 조 단위의 적자를 떠안았던 시절이 분명히 있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완전히 뒤집혔다. AI라는 거대한 물결이 몰려오면서 메모리 값을 정하는 쪽은 이제 애플이 아니라 삼성과 SK하이닉스, 마이크론이 되었다. 한때 갑이었던 기업이 이제는 청구서를 받아드는 처지가 된 것이다.
나는 이 책에서 어느 한쪽을 편들고 싶은 마음이 없다. 다만 궁금했다. 힘의 관계라는 것이 이렇게도 빠르게, 이렇게도 완전하게 뒤바뀔 수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그 뒤바뀐 힘의 관계 앞에서 애플이 중국의 메모리 기업으로 눈을 돌리는 모습을 보면서, 또 다른 질문이 떠올랐다. 과연 이것이 단순한 원가 절감의 문제일까, 아니면 잃어버린 주도권을 되찾으려는 몸부림일까. 이 책은 그 질문에 대한 완전한 답을 주지는 못할 것이다. 다만 지금까지 확인된 사실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독자와 함께 그 답을 향해 걸어가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