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가 철거되는 순간에도 우주는 민원 창구의 말투를 유지한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웃음은 엉뚱한 설정을 늘어놓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너무 큰 일을 지나치게 작은 절차로 설명하고, 정확하지 않은 안내서에 지식의 권위를 맡기며, 정답 42를 질문보다 먼저 내놓는 방식 자체가 세계를 의심하게 만든다.
이 책은 철거 통지서에서 시작해 안내서라는 소설 속 책, 무한 불가능 확률 추진기, 아서 덴트의 목욕가운, 자포드의 과잉, 마빈의 우울까지 농담의 구조를 층층이 펼친다. 줄거리보다 빠른 설정과 옆길로 새는 백과사전식 서술이 왜 작품의 약점이 아니라 고유한 사고법인지 설명한다. 관료제, 기술, 대통령제, 지식과 의미에 대한 풍자가 어떤 리듬으로 작동하는지도 짚는다.
라디오 드라마에서 태어난 작품이 소설, 텔레비전, 영화로 옮겨지며 어떻게 달라졌는지, 영국식 건조한 유머와 말장난이 한국어 번역에서 어떤 선택을 요구하는지도 살핀다. 농담을 해설하다 웃음을 죽이지 않고, 웃음만 따라가다 질문을 놓치지 않는 안내서다. 우주의 정답보다 좋은 질문이 왜 오래 남는지 확인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