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는 변하지 않는 본질이 있는가. 서로 다른 사물과 생명, 인간과 지식의 배후에는 하나의 공통된 질서가 숨어 있는가. 아니면 우리가 본질이라 부르는 것은 복잡한 세계를 정리하기 위해 붙인 이름에 불과한가.
이 책은 2,500년 동안 서양 사상을 관통해 온 ‘본질’의 문제를 철학사의 울타리 밖으로 끌어낸다. 탈레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시작해 중세의 보편자 논쟁과 니체·칸트·헤겔을 지나, 표준모형과 힉스 입자, 창발과 복잡계, 생물 종과 인공지능에 이르기까지 철학과 과학이 같은 질문에 어떻게 다른 답을 내놓았는지를 추적한다.
책을 이끄는 지도는 세 갈래다. 다양한 현상 뒤의 단 하나를 찾는 ‘단일본질주의’, 세계의 층위마다 고유한 질서를 인정하는 ‘다원적 본질주의’, 그리고 본질이라는 생각 자체를 의심하는 ‘반본질주의’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차이, 표준모형의 놀라운 성공과 한계, 물 분자에는 없지만 물 전체에서 나타나는 흐름, 모든 전자의 동일성과 생물 종의 흐릿한 경계가 이 세 지도를 번갈아 비춘다.
결핵 진단, 물 한 컵, 새 떼와 개미, 동일한 전자, 초끈이론과 인공지능처럼 익숙하거나 흥미로운 사례를 통해 어려운 철학적 논쟁을 생활과 현대 과학의 언어로 풀어낸다. 독자는 ‘본질이 있는가’라는 추상적인 질문이 의학의 분류, 과학의 설명, 인간을 규정하는 방식과 직접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 책은 어느 한 진영의 승리를 선언하지 않는다. 자연은 어떤 영역에서는 하나의 법칙과 동일한 입자로 놀라운 통일성을 보여 주지만, 다른 영역에서는 여러 층위의 설명과 변화하는 경계를 요구한다. 하나를 향해 나아가는 이성과 여럿을 받아들이는 겸손. 『세계는 본질이 있는가』는 이 두 시선을 함께 지닌 채 세계를 다시 바라보자고 권하는 철학·과학 교양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