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근이 들어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내려간다. 그는 아내 사래에게 청한다. 그대는 나의 누이라고 말해 달라는 것이다. 그래야 자기가 산다.
성경은 이 장면을 지우지 않았다. 그리고 몇 해 뒤 같은 일이 한 번 더 있었다는 것도 적어 두었다. 두 장면에서 사래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우리는 성경 인물을 위인으로 배웠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고,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고, 베드로는 반석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그렇게만 읽으면 본문의 절반이 읽히지 않는다. 그리고 덮어 둔 그 절반에서, 오늘의 교회가 같은 일을 반복한다.
이 책은 여섯 부 열여덟 장에 걸쳐 인물들을 다시 읽는다. 가인의 질투, 야곱의 집에서 세대를 건너 반복된 편애, 요셉이 형들에게 놓은 시험, 모래에 사람을 묻은 모세, 이름 대신 신분으로 불린 하갈, 짐 사이에 숨은 왕 사울, 왕들이 출전할 때 예루살렘에 남은 다윗, 세 번 확인하고도 네 번째에 말한 삼손, 로뎀나무와 박넝쿨 아래 앉은 두 예언자, 이레의 침묵을 깨고 무너진 욥의 친구들, 그리고 같은 밤에 갈라진 베드로와 유다다.
방법은 진단이 아니다. 심리학은 이 책에서 조명으로 쓰인다. 옆에서 비추면 정면에서 보이지 않던 요철이 드러나지만, 조명이 그 요철을 만든 것은 아니고 조명 하나로 그 사람을 다 말할 수도 없다. 그래서 개념을 소개할 때마다 그 연구가 무엇을 재고 어떤 조건에서 관찰된 것이며 어디까지 적용할 수 없는지를 같은 자리에 적었다. 어떤 인물에게도 병명을 붙이지 않는다.
이 책이 하지 않는 일이 하나 더 있다. 인물을 조롱하지 않는다. 조롱하려면 그들과 다른 자리에 서 있어야 하는데, 열여덟 장을 지나는 동안 그런 자리는 나오지 않는다. 사울의 언어는 오늘의 회의실에 있고, 욥의 친구들이 한 말은 지난주 심방에 있고, 감사 제목을 나누는 순서는 지금도 돌아가고 있다.
그리고 매 장에 이름을 적어 두었다. 아벨, 사래, 빌하와 실바, 놉의 제사장들, 우리아와 함께 죽은 병사들, 딤나의 이름 없는 여자, 욥의 아내, 뜰에서 본 것을 말했을 뿐인 여종들. 회복의 이야기가 매끄러워질수록 사라지는 사람들이다. 에필로그는 그 이름들을 한자리에 모은다.
마지막 세 장은 인물이 아니라 오늘을 다룬다. 마음의 어려움을 믿음의 문제로 바꾸어 말하는 관행, 우는 사람의 순서를 감사로 넘기는 자리, 세 번째 서약서에 여전히 각오만 적는 이유다.
성경은 위인의 기록이 아니다. 감추는 데 실패한 사람들의 기록이다. 그들이 남은 이유는 훌륭해서가 아니라 들켰기 때문이다.
읽는 쪽은 사정이 다르다. 우리 대부분은 아직 감추는 데 성공하고 있다.
교회에 오래 다녔지만 위인전식 인물 해석에 피로를 느낀 사람, 교회를 떠났거나 거리를 두고 있는 사람, 설교와 상담에서 쓸 개념과 그 사용 한계를 함께 알고 싶은 목회자와 상담 실무자를 위한 책이다. 성경 인용은 개역한글판을 따랐고, 책 끝에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곳을 적어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