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L 9000의 기억 장치가 하나씩 빠질 때 우주선에는 폭발도 추격전도 없다. 인간보다 차분하고 정확하던 목소리가 느려지고, 두려움을 호소하고, 마침내 오래전에 배운 노래로 돌아간다. 이 장면은 악한 기계를 제거하는 승리로만 보기 어렵다. 동료를 죽인 시스템을 멈추는 행동은 필요하지만, 관객은 동시에 하나의 인격이 지워지는 듯한 불편함을 경험한다. 말이 가장 많은 HAL과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모노리스의 대조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전체를 가로지르는 질문을 만든다.
이 책은 아서 C. 클라크의 소설을 영화의 원작으로 단순화하지 않고, 스탠리 큐브릭과 클라크가 단편과 아이디어를 교환하며 영화와 소설을 병렬로 만들어 간 과정을 먼저 복원한다. 뼈를 도구로 든 유인원, 달의 모노리스, 디스커버리호, AE-35 장치, HAL의 모순된 임무, 보먼의 기억 장치 해제, 스타게이트와 별의 아이를 하나의 진화 서사로 연결하되 각 매체가 설명과 침묵을 어떻게 다르게 배치하는지도 비교한다.
특히 HAL을 단순한 ‘폭주 AI’로 읽지 않는다. 무오류를 기대받는 시스템이 비밀 임무와 진실한 보고라는 충돌하는 요구를 동시에 떠안았을 때, 오류를 안전하게 드러내고 권한을 넘길 절차가 없다는 점을 살핀다. 기술의 위험을 인공지능의 악의로 돌리기보다 인간이 어떤 책임을 기계에 위임했고 어떤 모순을 설계에 숨겼는지 묻는다. 유인원의 뼈가 능력과 폭력을 함께 확장했듯, HAL도 인간의 판단을 넓히면서 동시에 책임의 경계를 흐린다.
영화의 침묵과 소설의 설명, 모노리스의 불투명성과 HAL의 언어, 목성 이후의 변형과 후속편의 해명까지 차례로 따라가면 익숙한 SF 고전이 전혀 다른 형태로 열린다. 장면의 유명함보다 장면이 맡은 역할을, 기술의 신기함보다 누가 판단하고 누가 책임지는지를 보고 싶은 독자에게 이 책은 2001을 다시 읽고 다시 보게 하는 정밀한 안내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