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이미 끝난 뒤 한 남자가 해변에 남아 과거를 되짚는다. 『오릭스와 크레이크』는 파국이 올 것인지 묻는 미래소설이 아니라 파국 뒤에서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가”를 복원하는 회고의 소설이다. 눈사람이라는 이름을 쓰는 지미의 기억을 따라갈수록 유전자 기업, 벽으로 분리된 주거지, 혼종 동물, 온라인 폭력, 욕망을 상품화하는 산업이 하나의 사회로 이어진다.
『눈사람의 낙원』은 멸종을 과학기술의 폭주 한 줄로 설명하지 않는다. 피군과 가짜 음식, 치료와 욕망을 동시에 파는 기업의 논리, 화면 속 폭력에 익숙해지는 감각, 오릭스가 지미와 크레이크의 기억 속에서 서로 다른 이미지로 소비되는 방식을 차례로 읽는다. 크레이크가 설계한 신인류는 질투와 소유, 질병을 줄였지만 그 완벽함이 자유와 인간성의 문제를 어떻게 다시 열어 놓는지도 묻는다.
신을 없애려 한 세계에서 눈사람이 크레이커에게 오릭스와 크레이크의 창조 신화를 만들어 주는 장면은 특히 중요하다. 노래와 그림, 의례가 되돌아오는 과정을 통해 인간의 결함을 제거하는 계획과 이야기의 필요성이 충돌한다. 마지막에는 3부작의 시선까지 넓혀 한 사람의 회고가 가린 목소리를 점검한다. 기술의 위험을 예언하는 책으로만 읽었던 독자라면, 파국을 만든 욕망과 언어의 구조를 훨씬 깊게 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