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는 사람을 세지만, 그들이 지새운 밤까지 헤아리지는 못한다.
『가격 밖의 사람들』은 한국 자본시장을 뒤흔든 열두 사건을 소재로 쓴 기록서사시집이다. 단일종목 레버리지, 옵티머스·라임 펀드, 해외금리연계 DLF, 홍콩 H지수 ELS, CFD 주가폭락, 원유선물 ETN, 부동산 PF, 테라·루나, 공매도, 물적분할, 레고랜드 ABCP 사태를 열두 편의 장시로 다시 바라본다.
이 책은 금융상품의 구조만을 설명하지 않는다. 수익률과 만기, 담보비율과 괴리율, 신용등급과 손실배상비율처럼 자본시장이 사용하는 정확한 숫자가 한 사람의 통장과 식탁, 일터와 잠 못 이루는 밤에 도착했을 때 무엇을 남기는지 묻는다.
각 작품은 인간 화자와 약관의 작은 글씨, 알고리즘과 금융상품, 생활 속 사물과 군중의 목소리가 서로 응답하는 ‘복리합창체’로 쓰였다. 공개된 기록과 제도의 언어를 바탕으로 하되, 여러 사람의 경험과 생활의 가능성을 겹쳐 만든 합성 화자를 통해 사건 안쪽의 시간을 복원한다.
열두 편의 장시는 각각 12부로 구성되어 모두 144개의 장면을 이룬다. ‘배수와 약속’, ‘무너지는 기준’, ‘신뢰 이후’라는 세 악장을 따라가며 약속이 만들어지는 순간부터 기준이 붕괴하는 과정, 사고가 끝난 뒤에도 남아 있는 신뢰의 잔해까지 기록한다.
제도의 잘못을 개인의 탐욕으로 지우지 않고, 개인의 선택을 제도의 잘못 뒤에 감추지도 않는다. 가격은 되돌아오고 규칙은 고쳐질 수 있지만, 사람의 시간은 같은 계산식으로 복원되지 않는다. 이 책은 바로 그 가격 밖에 남은 사람과 사물, 기억의 주소를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