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법을 어기지 않았는데, 어떻게 회사가 죽을 수 있는가.
"국민마트"로 불리던 대형마트 한아름유통이 사모펀드에 인수된다. 인수대금 오조 팔천억 원 가운데 사조 팔천억이 빚이었고, 그 빚은 인수한 쪽이 아니라 인수된 회사의 장부에 실린다. 회사는 자기 점포를 팔아 세입자가 되고, 판 돈은 배당과 유상감자로 위로 올라간다. 십 년 뒤 남은 것은 불어난 임차료와 만기가 다가오는 종이들뿐이다. 그 종이는 회생 신청 닷새 전까지 은행 창구에서 퇴직금을 든 개인들에게 팔린다.
『청산』은 이 과정을 다섯 개의 시선으로 따라간다. 인수를 설계한 사모펀드 회장 강민철, 그 곁에서 숫자를 만든 전무 최영호, 한아름에서 반평생을 보낸 직원 오영선, 퇴직금 이천만 원을 종이 한 장과 바꾼 일흔의 경비원 권말수, 그리고 서류를 아무리 뒤져도 위법을 찾지 못하는 감독자 서지완. 다섯 사람 중 누구도 법을 어기지 않는다. 그런데 회사가 죽고, 이만 명의 저녁이 사라진다.
저자는 금융감독원에서 33년간 자본시장을 감독하고 조사했다. 차입매수LBO와 세일 앤 리스백, 배당과 유상감자, 신용등급 강등과 전자단기사채, 회생담보권과 무담보채권, 청산가치와 계속기업가치 — 소설의 모든 장치는 실제 제도의 문법 그대로 작동한다. 이 책이 던지는 질문은 하나다. 위법은 잡을 수 있다. 잡히지 않는 것은 합법의 설계다. 법이 한 칸씩 볼 때, 한 칸씩만 걸어서 전부를 가져가는 설계를 무엇이라 불러야 하는가.
『여덟 문항』에 이어, 자본시장의 안쪽을 아는 사람만 쓸 수 있는 두 번째 금융소설이다.
이 소설은 픽션이며, 등장하는 회사와 인물, 사건은 모두 허구다. 특정한 회사나 사람, 특정한 사건을 가리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