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바람과 들판에서 시작된 한 지리학자의 삶은 결국 세계의 기후와 사람을 향해 나아갔다. 『쉼팡에 앉아서』는 기후학을 연구해 온 이승호 교수가 평생 걸어온 길 위에서 만난 풍경과 사람, 그리고 삶의 이야기를 담아낸 책이다.
저자는 제주도 중산간 마을에서 태어나 성장했고, 이후 서울에서 오랜 시간 학문과 교육의 길을 걸으며 30여 년 넘게 학생들에게 기후학을 가르쳐 왔다. 북극과 중앙아시아, 몽골 초원과 아프리카, 아일랜드에 이르기까지 세계 곳곳을 답사하며 만든 자료는 고등학교 교과서와 대학교 지리학과 전공 필수 도서인 『기후학』의 구석구석을 채워 주었고, 그때의 경험이 이 책 곳곳에 살아 숨 쉰다. 답사가 직업인 덕에 다닌 곳도 많은데, 제주에서 서울까지의 왕래도 만만치 않다. 장소가 많아 여행에세이 같기도 하지만 단순한 에세이가 아니다. 왜 지리였는지에 대한 고백이자, 그로 인해 얻은 유의미한 결실을 담은 지리 인생에세이다. 나아가 자연과 인간의 삶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따뜻한 시선으로 풀어낸 기록이다.
풍요로웠다면 나 역시 시간을 우선순위로 두었겠지만, 항상 비용이 우선순위였다. 그런 덕에 서울과 제주를 잇는 다양한 수단을 이용해 볼 수 있었다. 용산역에서 완행열차에 자리를 잡고, 열 시간 넘게 시달린 후 목포역에 내렸다. 11시에 출항하는 안성호를 타기 위해 거의 몸무게의 절반이 넘는 배낭을 짊어지고 여객선 터미널로 내달렸다. 나를 태운 안성호가 다도해를 벗어나자마자 시작한 뱃멀미는 제주항까지 이어졌다. 그렇게 힘든 여정이 헛되이 시간만 낭비한 것은 아니었다. 배가 묶이기도 하고, 노령산맥에 눈이 내리면 고속버스가 거북이걸음을 하기도 하면서 많은 것을 깨달았다. 호남지방과 제주도의 기후를 비교적 잘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이런 여정 덕이었다. _시작하면서 중에서
저자의 고향 마을에는 공동목장이 있었고, 그곳으로 가려면 급경사의 길을 올라야 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언덕에 올라설 즈음, 쉴 만한 곳이 마련되었다. 먼 길에 쉬어야 할 사람들이 편하게 앉아 숨을 고르며 그간의 안부를 묻고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는 곳, 쉼팡이다. ‘쉼팡’은 ‘쉼’과 ‘팡’이 합성된 제주도 말로 팡은 평평한 턱을 뜻한다.
가파른 길을 오르던 사람들이 잠시 앉아 숨을 고르고 안부를 나누던 장소처럼, 이 책 역시 독자에게 잠시 머물며 삶을 돌아보게 하는 공간이 된다. 담담한 문체로 살아온 시간을 들려주는데 그 속에 기후와 지리, 인간과 환경이 있다.
제주도 중산간 마을에는 어디나 공동목장이 있었다. 마을은 대략 해발 150m 전후에 자리 잡았고, 공동목장은 해발 200~300m인 곳이었다. 겨우내 쇠막외양간을 지키던 가축은 봄에 새싹이 나오기 시작하면 공동목장으로 올라가 가을이 올 때까지 자유롭게 풀을 뜯었다. 주인이 가끔 목장을 찾아 확인하고, 필요한 약을 발라 주면 그만이었다. 공동목장은 거의 나무가 자라지 않는 광활한 초원이었고, 군데군데 물웅덩이가 있어서 가축들을 불러 모았다.
중략 문제는 그 시기에 집집이 가축을 키울 여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사람이 먹고살 일을 해결해야 하니, 모두 밭으로 나가야 했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려고 ‘번쇠番소’라는 공동 사육 제도를 운용하였다. 작은 동네 단위로 10~15가구를 한 묶음으로 하여 순번을 정해 놓고 하루씩 가축을 돌보았다. 결국 10~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