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개념은 태어난 자리에 머무르지 않는다. 인도의 어느 숲, 붓다가 제자들에게 "나는 없다"고 말했던 그 순간의 사유는 이천오백 년의 시간과 수천 킬로미터의 대륙을 건너며 계속 다른 얼굴을 하고 나타났다. 반야심경의 노래가 되었다가, 나가르주나의 날카로운 논증이 되었다가, 중국 선사의 몽둥이가 되었다가, 마침내 오늘날 어느 물리학자의 논문 각주에 슬쩍 인용되기도 한다.
이 책은 그 하나의 개념, 공空이 걸어온 길을 따라가 보려는 시도다. 공은 흔히 "비어 있음"으로 번역되지만, 그 말은 시작에 불과하다. 무엇이 비어 있다는 것인가. 왜 비어 있음이 깨달음과 연결되는가. 그리고 이 사유는 왜 시대와 지역을 건널 때마다 조금씩 다른 옷을 입어야 했는가.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다. 보통 하나의 철학적 개념이 이토록 오랜 시간 살아남으려면, 그것은 대개 아주 견고하고 고정된 정의를 가지고 있어야 할 것 같다.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뼈대가 있어야 시간의 풍화를 견딜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은 정반대의 방식으로 살아남았다. 그것은 단단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유연했기 때문에, 고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천오백 년을 건널 수 있었다. 마치 물이 그릇의 모양을 따라 형태를 바꾸듯, 공이라는 사유는 인도의 논리학, 중국의 형이상학, 한반도의 실천철학, 티베트의 스콜라 철학이라는 각기 다른 그릇에 담기며 그때그때 필요한 모양으로 스스로를 조율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