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을 잃고 초로기 치매를 앓는 아내마저 요양원에 맡긴 연우는 삶의 끝에서 가까스로 살아남는다. 모든 것을 정리한 그는 지리산 자락의 고택 ‘청연재’로 향한다. 그곳에서 만난 현묘와 현덕, 저마다의 상처와 질문을 품고 찾아오는 사람들과 함께 지내며 연우는 자신을 붙들어 온 고통과 기억을 다시 바라보기 시작한다. 『이미, 퀘렌시아』는 상실과 죄책감, 용서와 고독을 지나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원적인 물음에 다가가는 철학적 소설이다. 무아와 연기, 인드라망과 현존에 관한 사유가 따뜻한 밥 한 끼, 콩을 까는 손길, 자유롭게 이어지는 춤과 어우러진다. 작품은 고통을 쉽게 지우거나 극복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생각과 감정은 일어났다가 사라지며, 상처 입은 채로도 우리는 다시 숨 쉬고 살아갈 수 있다고 전한다. 연우가 오랫동안 찾아 헤맨 퀘렌시아는 멀리 있는 피난처가 아니었다. 그것은 단 한 번도 사라지지 않은 채, 이미 자신의 안에 머물러 있던 고요한 자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