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구치 이치요는 메이지 시대를 대표하는 여성 소설가로, 1872년 태어나 1896년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난 짧은 생애 동안 여러 단편을 남겼다. 본명 히구치 나쓰인 그녀는 여성의 삶과 노동, 빈곤과 가족애를 섬세하게 그린 작품들로 일본 근대문학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이 책이 소개하는 『섣달그믐』은 그 여러 작품 중 겨울의 차가운 공기를 배경으로 한 한 편의 단편이다. 작가의 예리한 관찰과 따뜻한 시선이 어우러진 이 작품은 오늘날에도 깊은 울림을 준다.
오미네는 야마무라 댁에서 하녀로 일하며 매일 새벽부터 우물가에서 목욕물을 길어 나르느라 손발이 얼어붙는다. 짐을 지고 미끄러져 우물 턱에 정강이를 부딪치고 두레박까지 깨뜨리자, 마님은 시퍼런 힘줄을 세우며 엄한 훈계를 내린다. 부엌은 북향이라 섣달 바람이 휭휭 불어닥치고, 아궁이 불 앞에서 잠깐 쬐는 불이 어느새 한나절이 되는 고된 일상이 이어진다. 하녀들이 자주 바뀌는 집이지만 오미네는 정성을 다해 버텨나가며 마음을 다잡는다.
가을부터 외삼촌이 앓아누워 채소가게 장사마저 접고 뒷골목 셋집으로 옮겼다는 소식을 들은 오미네는 문병 한 번 못 가는 괴로움에 시달린다. 섣달 그믐달 온 식구가 극장 구경을 가는 날, 오미네는 놀이 대신 말미를 청해 뜻밖의 자유를 얻고 인력거 위에서 고이시카와를 향해 애가 탄다. 하쓰네초라는 가난한 동네에 도착하자 약병을 든 비쩍 마른 아이의 뒷모습이 보이고, 오미네는 닮은 데가 있어 성큼 다가간다. 그 아이가 바로 외삼촌 아들 산노스케임을 확인하자 누나라고 불리며 이끌려 가고, 어둑한 뒷골목 깊숙한 곳으로 들어선다. 오미네는 오래 그리워하던 가족의 품을 찾아 발걸음을 옮긴다.
이 전자책은 히구치 이치요의 일본어 원문에 후리가나를 달아 읽기 편하게 구성하였으며, JLPT 레벨별로 정리한 단어장을 함께 수록하여 학습 효과를 높였다. 작품의 섬세한 감정과 메이지 시대 생활상을 그대로 전달하는 한국어 번역이 원문과 나란히 실려 있어 비교하며 읽을 수 있다. 독자는 한글 번역과 원문을 함께 보며 작가의 언어가 지닌 섬세함을 직접 느낄 수 있다. 또한 작품의 분위기를 한층 풍성하게 하는 우키요에 컬렉션이 포함되어 있어 글과 그림이 어우러진 입체적인 독서가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