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성은 하늘에서 가장 느리게 도는 별로 여겨졌고, 오래전부터 우울한 기질의 표식이었다. 그러나 『느린 시선의 우울』이 말하는 우울은 무기력한 침잠이 아니다. 세상에 뒤처진 자리에서 남들이 지나친 것을 줍고, 사라지는 것 앞에서 걸음을 늦추며, 표면 아래의 깊이에 도달하게 하는 시선이다.
이 책은 발터 벤야민과 W. G. 제발트, 밀란 쿤데라를 오래 읽어 온 한 독자가 서른세 편의 독서 기록 사이에 선을 긋는 시도이다. 보들레르와 프루스트, 브르통과 보르헤스, 카프카와 알렉시예비치, 손택과 레비나스가 그 사이를 채운다. 각 글은 한 권의 책에서 출발하지만, 앞뒤의 글과 공명하며 한 권의 긴 사유로 이어진다.
그 사유를 잇는 핵심 매체는 사진이다. 벤야민에게 사진은 아우라를 해체한 기술이자 초기 초상의 마지막 광채였고, 제발트에게는 사라진 것의 불완전한 흔적이며, 쿤데라의 세계에서는 사진 속 얼굴마저 권력과 망각에 의해 지워진다. 복제된 얼굴에서 기억과 시간으로, 떠도는 자의 발걸음에서 역사의 폐허로 이동한 시선은 마침내 타인의 고통 앞에 멈춰 선다.
마지막에 레비나스의 얼굴은 앞선 모든 우울이 향하던 곳을 밝혀 준다. 잃어버린 것을 쉽게 보내지 못하는 마음은 아직 지킬 수 있는 타인을 향한 책임으로 바뀐다. 미학처럼 보이던 것이 윤리가 되고, 애도가 앞으로 내딛는 걸음이 된다. 『느린 시선의 우울』은 사라진 것들을 오래 바라본 사람만이 타인의 얼굴을 향해 천천히 돌아설 수 있다고 말하는 문학적 사유의 기록이다.
특기사항
· 서른세 편의 독서 기록을 여섯 부로 엮되, 개별 서평을 나열하지 않고 편과 편이 서로를 비추는 하나의 긴 사유로 구성했다.
· 발터 벤야민을 축으로 W. G. 제발트와 밀란 쿤데라를 잇고, 보들레르·프루스트·브르통·보르헤스·카프카·알렉시예비치·손택·레비나스를 하나의 별자리 안에 놓는다.
· 사진을 핵심 매체로 삼아 아우라의 소멸, 사라진 얼굴의 흔적, 망각과 기억, 역사적 폐허, 타인의 고통을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한다.
· 얼굴과 부재에서 출발해 기억과 시간, 떠도는 자, 폐허와 역사, 건너지 못한 자를 거쳐 타인의 윤리에 도달하는 여섯 단계의 서사를 갖는다.
· 우울을 무기력이나 침잠이 아니라 사라지는 것을 오래 바라보게 하는 느린 시선, 잃어버린 것에 대한 충실, 타인을 향한 책임으로 새롭게 읽는다.
· 본문에서는 다루는 책의 제목을 먼저 밝히지 않고, 편 번호를 따라 권말 미주와 「읽은 판본」에서 대상 저작과 온전한 서지를 확인하도록 설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