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구치 이치요樋口一葉, 1872~1896는 메이지 시대를 대표하는 여성 소설가로, 스물네 살의 짧은 생애 동안 「키 재기」, 「탁한 강」, 「열사흗날 밤」을 비롯한 스무 편 남짓의 단편을 남겼다. 헤이안 고전문학의 우아한 문체를 이어받으면서도, 일상의 사소한 순간에서 정취와 애수를 함께 길어 올리는 섬세한 필치로 정평이 나 있다. 이 전자책은 그런 이치요의 소품 세 편, 「무료한 이야기」·「비 오는 밤」·「달밤」을 함께 묶었다.
「무료한 이야기」는 재치가 돋보이는 짧은 소품이다. 두견새 울음소리를 아직 들어본 적 없는 화자는 벗의 말을 듣고 밤마다 잠을 설쳐가며 그 소리를 기다린다. 마침내 새벽녘 귓가에 들려온 소리에 감격해 옛 벗을 그리며 눈물짓기까지 하지만, 뒤늦게 찾아온 다른 벗 앞에서 자랑삼아 이야기를 꺼냈다가 뜻밖의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던 소리가 실은 처마 밑에 늘 있던 산까마귀 울음이었다는 것. 스스로를 웃음거리 삼는 결말은 이치요 특유의 섬세한 감성 이면에 숨은 유머 감각을 잘 보여준다.
「비 오는 밤」은 가을비 내리는 밤, 바느질감을 꺼내 들고도 손이 가지 않아 옛 추억에 잠기는 화자의 상념을 담은 소품이다. 어린 시절 바느질을 가르쳐 주시던 이모는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고, 늙으신 부모님의 여윈 어깨를 주무르며 느끼는 애달픔이 빗소리와 함께 잔잔히 번져나간다.
「달밤」은 못물에 비친 달그림자를 들여다보다 어린 조카가 장난삼아 돌아가신 오라버니의 벼루를 못에 빠뜨리고 마는 삽화를 중심에 둔 소품이다. 달밤이 불러일으키는 그리운 벗에 대한 상념과, 뜻하지 않게 잃어버린 유품에 대한 죄스러운 마음이 겹쳐지며 여운을 남긴다.
이 전자책은 세 작품의 일본어 원문에 후리가나를 병기해 원문 독해를 돕고, 문단별 단어장을 수록해 학습 효율을 높였다. 원문의 리듬과 정취를 살린 한국어 번역을 함께 실었으며, 각 작품의 정서에 어울리는 우키요에두견새와 황매화, 가라사키 밤비, 시나노 다고토의 달를 컬렉션으로 함께 수록해 시각적으로도 작품의 여운을 느낄 수 있도록 구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