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이름은 오랫동안 문을 여는 말이 아니라 잠그는 말이었다. 십자군은 신의 뜻을 앞세워 성문을 부수었고, 정복자들은 복음의 이름으로 대륙을 삼켰으며, 오늘의 전쟁도 여전히 각자의 신을 자기편에 세워 두고 벌어진다. 이 책은 그 오래된 문법을 처음부터 다시 읽는다. 1부는 정치가 어떻게 신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왔는지를 미시오데이와 주권의 계보를 따라 추적하고, 2부는 그렇게 소유된 신이 근대에 이르러 어떻게 죽음을 선고받았는지를 니체에서 본회퍼까지 짚어 간다. 저자가 겨누는 것은 신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손에 쥐었다고 믿는 그 신, 곧 우상이다.
그리고 3부에서 책은 방향을 바꾼다. 손님을 뜻하는 라틴어 호스페스와 적을 뜻하는 호스티스가 한 뿌리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사실에서 출발해, 저자는 환대가 본래 안전한 말이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 문 앞에 선 낯선 이는 신일 수도 있고 위협일 수도 있으며, 우리는 끝내 그것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알아야만 열 수 있는 문이라면 그것은 이미 환대가 아니라 심사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그러했듯, 인식이 환대를 부른 것이 아니라 환대가 인식을 열었다. 그러므로 모름은 환대의 결함이 아니라 조건이다. 이 책이 마지막에 이르러 내놓는 명제가 그것이다. 환대는 신을 모른다, 그래서 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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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특징]
어떤 책은 답을 주기 위해 쓰이고, 어떤 책은 물음을 바로 세우기 위해 쓰인다. 이 책은 후자다. 신의 이름이 그 어느 때보다 자주 무기가 되는 시대에, 저자는 우리가 확신에 차서 부르는 그 신이 과연 우리가 안다고 믿는 그 신이 맞는지를 끝까지 밀어붙인다. 전쟁의 신을 떠받든 정치신학에서 출발해 '신의 죽음'을 지나 환대와 '이방인 됨'의 선교에 이르기까지, 열네 개의 장이 하나의 논증으로 이어진다. 슈미트와 아감벤, 니체와 본회퍼, 데리다와 레비나스가 차례로 불려 나오지만 그 사유는 끝내 관념에 머물지 않고, 1492년의 정복과 제주 앞바다에 당도한 500명의 얼굴 앞에 선다. 신을 완벽히 소유했다고 믿는 자는 그 소유의 이름으로 이방인을 심판하지만, 신을 끝내 다 알 수 없다고 고백하는 자는 도리어 문 앞의 낯선 이를 맞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