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읽고 나면 오래 남은 이미지와 분위기가 자기 문장에도 들어오곤 한다. 그것을 다시 써 보는 일은 창작의 출발이 될 수 있다.
어려운 일은 그다음이다. 닮은 분위기를 걷어낸 자리에도 자신이 쓴 시가 서 있을 수 있는가.
원작의 눈에 띄는 명사를 하나도 빌리지 않고도, 읽는 동안 경험한 낯선 관계를 자기 언어로 시험할 수 있는가. 이 책은 김혜순의 『날개 환상통』을 출발점으로 삼되, 원작을 재현하는 대신 독립적인 창작의 조건을 묻는다.
몸의 경계, 이미지의 운동, 연작의 배열은 정답 세 개가 아니라 세 번의 질문이다. 누가 말할 때 경계가 생기는가.
『날개 환상통』, 이미지가 몸의 경계를 넘을 때은 몸의 경계·이미지의 운동·연작의 배열를 나의 독립 창작으로 옮기는 수업이라는 문제를 작품 감상에만 머물지 않고 실제 집필의 선택으로 옮긴다. 「비에 젖은 건축 도면에서 시작하는 연작의 계약」에서 독자가 처음 붙잡아야 할 장면과 목소리를 확인하고, 「몸의 경계, 몸과 목소리의 첫 경계」와 「연작의 배열 뒤에 남는 다른 목소리」에서 그 장치가 흔들리는 조건을 시험한 뒤 「낭독·배열·최종 재평가」에서 자기 문장에 남길 규칙을 다시 정리한다.
읽기의 목표는 원작의 분위기나 표현을 비슷하게 재현하는 데 있지 않다. 장면의 순서, 정보의 공개 시점, 화자의 거리, 이미지와 사물의 역할처럼 실제 효과를 만드는 요소를 분해한 뒤 전혀 다른 인물과 공간에 적용해 보는 것이 핵심이다.
작품을 읽은 뒤 남는 인상만 적는 대신, 한 장면이 어떤 순서로 제시되고 무엇이 늦게 공개되며 어떤 말이 생략되는지를 작업 단위로 적어 보게 한다. 같은 장치를 다른 인물과 공간에 옮겼을 때 효과가 유지되는지, 원작의 문장에 기대지 않고도 긴장과 여백이 살아나는지를 확인하면서 읽기와 쓰기의 거리를 조절한다.
한 번의 수정으로 문장이 좋아졌다고 결론 내리지 않는 것도 중요한 특징이다. 수정 전후를 비교해 정보가 더 빨리 드러났는지, 화자의 거리가 달라졌는지, 장면의 압력이 커졌는지 살피며 얻은 것과 잃은 것을 함께 기록한다. 이 과정은 원작의 효과를 자기 글의 판단 기준으로 바꾸는 데 초점을 맞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