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 나면 어디에 묻히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더러운 유정 웅덩이든, 높은 언덕 위의 대리석 탑 안이든. 죽은 자는 그저 거대한 잠빅 슬립에 빠질 뿐, 지저분한 뒷수습 따위엔 신경 쓰지 않는다.
사라진 사위, 누드 사진 협박, 그리고 연쇄적인 살인.
은빛 가발의 여인이 내뱉은 차가운 키스 뒤에 숨겨진 진실은 무엇인가?
영화 “빅 슬립(1946)”의 원작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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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먼드 챈들러의 대표작 『빅 슬립』은 현대 하드보일드 추리 소설의 전형을 세운 고전 중의 고전이다. 1930년대 후반 로스앤젤레스를 무대로, 냉소적이지만 자신만의 확고한 도덕적 원칙을 굽히지 않는 사립 탐정 필립 말로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이야기는 10월 중순, 비가 쏟아지기 직전의 어느 아침에 시작된다. 말로는 거대한 부를 거머쥐었으나 육신은 이미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 스턴우드 장군을 만나러 간다. 장군은 통제 불능인 두 딸, 비비안과 카먼을 둘러싼 지저분한 협박 사건을 해결해 달라며 그를 부른 것이다. 썩어가는 난초 향이 짙게 배어 있는 온실 안에서, 말로는 노장군의 마지막 자존심과 가문의 어두운 비밀을 동시에 지켜내야 하는 임무를 떠안는다.
처음에는 단순한 도박 빚 문제처럼 보였던 사건은, 가이거라는 인물이 운영하는 은밀한 음란물 대여점과 얽히면서 점점 더 짙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수사가 깊어질수록 말로는 실종된 장군의 사위 러스티 리건의 자취를 쫓게 되고, 이 도시의 법망 위에 군림하는 거물 도박꾼 에디 마스와 그의 잔혹한 해결사 카니노가 짜놓은 거대한 판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
챈들러 특유의 건조하고 비정한 문체는 화려한 할리우드 이면에 감춰진 인간의 탐욕과 부패를 생생하게 그려낸다. 특히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거대한 잠(The Big Sleep)은 죽음을 상징하는 은유로, 이야기의 마지막을 장식하며 부나 명예, 심지어 어떻게 죽었는지조차 죽음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허무주의적 정서를 강렬하게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