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中心에 中人이 있었다!
조선 후기는 역사적으로 다양한 현상들이 존재했던 시기였다. 중국의 고증학에 영향을 받은 실사구시 학풍(실학)과 천주교의 유입 및 중인 계급의 성장은, 300년 넘게 이어져온 유교적 사회 질서를 뒤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정조대왕 집권기로 대표되는 이 시기를 유럽의 르네상스나 계몽주의와도 비교하는데, 이것은 그 당시가 문화적으로 많은 시도가 행해졌던 시기였을 뿐 아니라, 근대화로 가는 중요한 가교였기 때문이다.
특히 전문직에 종사한 중인의 활약은 실로 대단했다. 당시 중인은 신분적으로 사대부 양반 계층에 훨씬 미치지 못하면서도, 평민이나 심지어 천민에게도 존중 받지 못한 경계인이었다. 그럼에도 중인 가운데는 문·사·철을 뛰어넘는 비범함으로 문예부흥과 근대화를 주도했던 인물이 여럿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의료(의원)·법률(율관)·금융(계사)·외교(역관)·천문과학(관상감)·언론(박문국) 등의 전문지식에서 미술(화원)·음악(악생·악공)·문학 등의 예술에 이르기까지, 촉망받는 모든 분야의 중심에 조선의 르네상스를 꽃피운 중인이 있었다.
좁고 지저분한 거리를 배회하던 ‘반쪽 양반’
실학자 이중환은 인문지리서 「택리지」의 서론인 ‘사민총론’에서 백성을 사(士)·농(農)·공(工)·상(商) 으로 나누어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옛날에는 사대부가 따로 없었고, 모두 백성(民)이었다. 백성에는 네 가지가 있는데, 선비가 어질고 덕이 있으면 임금이 벼슬을 시켰고, 벼슬하지 못한 자는 농사를 짓거나 장인(匠人)이 되거나 장사꾼이 되었다.
즉, 이중환은 사·농·공·상을 신분으로 보지 않고 직업으로 보면서, “사대부라고 하여 농·공·상을 업신여기거나 농·공·상이 되었다고 사대부를 부러워한다면, 이는 모두 근본을 모르는 자들이다”라고 하였다. _385쪽 참조
그러나 이중환의 이러한 논지는 당시 신분 차별이 매우 심각했음을 방증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특히 사·농·공·상으로 나눈 이중환의 분류 어디에도 중인이 속할 수 있는 곳은 없었다. 결국 조선시대 신분 차별의 본질은 어정쩡한 경계인으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중인의 사회적 정체성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흔히 ‘반쪽 양반’이라 불리는 서얼은 육조(六曹)와 삼사(三司) 등의 중앙 관직으로 진출하는 것이 제도적으로 금지되었기에, 대부분 역관·의원·율관·산관·화원 등의 기술직 관원이나 하급 행정 관리인 경아전과 서리에 종사했다. 서얼 출신이 기술직 관원이나 하급 행정 관리가 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