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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에 수록된 미스테리한 살인사건과
정약용의 역동적이고 숨막히는 재판을 통해 법의 진정한 정의를 제시한다!
세계적인 명판관 정약용
얼마 전 대법원은 ‘청소년용 재판교재’를 출간하면서 세계적인 명판관으로 솔로몬, 포청천, 그리고 우리나라의 다산 정약용을 꼽았다. 그렇다면 대법원은 왜 세계적인 3대 명판관으로 정약용을 꼽았을까. 이는 그가 저술한 흠흠신서에서 법리 논쟁을 치열하게 전개했기 때문이다. 그가 주장한 법리는 여론 재판, 권력 남용사건, 미궁에 빠진 살인사건, 정당방위 살인사건 등에서 빛을 발한다. 오늘 날 살펴보아도 전혀 흠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그의 판결은 정확하고 법의 정수를 살피고 있다.
소설로 최초 소개되는 조선시대 재판사건
이 소설은 우리가 그 동안 알지 못했던 조선시대에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을 재판하고 그 판결문을 다루고 있다. 조선시대의 재판이 4심제였다는 사실과 양반 부인의 팔을 잡았다가 사형을 당한 천민의 이야기를 다룬 조선의 법은 충격적이다. 조선의 법은 억울하게 사형을 당하는 사람이 없도록 사형수에게는 특별히 상복을 시행한다. 상복은 사형수들만 특별하게 재판을 한 번 더 하는 제도로 형조에 상복사를 따로 운영하고 있었다.
정약용은 진주목사를 역임했던 정재원과 윤선도의 손녀인 해남윤씨 사이에서 4남 1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음사로 진주목사를 지냈으나, 고조 이후 삼대가 포의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정약용은 1789년 식년문과 갑과에 급제하여 희릉직장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나갔다. 정약용은 이후 10년 동안 개혁군주인 정조의 특별한 총애 속에서 예문관 검열,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홍문관 수찬, 경기 암행어사, 사간원 사간, 우부승지, 좌부승지, 곡산부사, 병조참지, 부호군, 형조참의 등을 두루 역임했다. 특히 1789년에는 한강에 주교(배다리)를 준공하고, 1793년에는 수원성을 설계하는 등 실학을 직접 실천하기까지 했다.
정약용이 살인사건을 집대성한 『흠흠신서』를 집필한 것도 이런 실학적 입장을 반영한 것이다. 정약용은 황사영백서사건의 여파로 전라도 강진에서 장장 18년 동안 고난에 찬 유배생활을 했다. 그는 이 강진 유배기간 동안 학문 연구에 매진했고, 수많은 저서를 집필하여 조선의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불린다. 그는 전 생애를 통해 위기에 처한 조선왕조의 현실을 개혁하고자 했으며, 그 현실 개혁의 이론적 근거를 확보하기 위해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가 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