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黃玹, 1855∼1910)
철종 11년(1855) 광양현 서석촌에서 태어났는데 자는 운경(雲卿)이라 했고, 매천은 그의 호다. 30세 무렵 이웃한 구례 땅에 정착하여 세상에서는 그를 구례 사람이라 일컫게 되었다. 출신 가계를 보면 장수황씨로 황희 정승의 후손이기는 하나, 중간에 가세가 영락해서 그의 조부에 이르러서는 상업으로 생활을 영위했다고 한다. 이렇게 축적한 재산을 기반으로 황현은 1천 권의 장서를 갖추고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신동으로 소문이 자자했으나, 관력은 불우하여 34세에야 겨우 성균관의 생원이 되는 데 그쳤다. 하지만, 청년기에 경험한 10여 년의 서울 생활에서 황현은 당대의 일류 문인들인 이건창(李建昌, 1852∼1898), 강위(姜瑋, 1820∼1884), 김택영(金澤榮, 1850∼1927) 등과 교유했다.
생원이 된 후로 황현은 서울 생활을 곧바로 청산했다. 그 무렵 조선은 1882년의 임오군란과 1884년의 갑신정변의 뒤를 이어 가중되는 청·일 양국의 조선 침략 경쟁으로 나라의 존망이 위협받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왕과 민비를 중심으로 한 소위 집권 관료들은 극도로 부패했다. 그들은 권력과 개인의 이익을 앞세워 백성의 고혈을 착취하고 있었다. 황현의 눈에는 마치 미쳐 날뛰는 귀신의 꼴로 비쳤을 것이다.
혼란한 세상을 등지고 귀향한 황현은 고향으로 내려가 자신의 거실에 구안옥(苟安屋)이라 이름을 붙이고 독서와 시작(詩作)으로 세월을 보냈다. 그러는 동안 서울에 있는 여러 친구들이 종종 편지를 보내어 “다시 서울에 올라와서 구국 운동에 참가하라”고 여러 차례 권유했다. 그러나 황현은 그때마다 회답하기를 “그대들은 어찌 나를 귀신 나라에서 날뛰는 미친 사람들 가운데로 끌어들여 같은 귀신, 미친 사람으로 만들려 하는가” 하고 도리어 엄절히 책망했다. 그의 이 같은 은둔 생활 중 조선의 정세는 날로 구렁텅이로 떨어져 가는 판국이었다.
1894년(고종 30) 정월에 동학 농민운동이 일어나고 곧이어 청·일 전쟁이 터졌다. 국내의 민심은 크게 소용돌이쳤고 국토는 남의 나라의 전쟁터로 제공되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근대적인 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식민지화 정책을 강요해 왔다. 일본의 노도와 같은 제국주의 야욕은 조선의 왕비를 무참히 살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켰고 그로 인한 민족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다른 한편, 그동안 음성적으로 침략하던 러시아 세력이 일본에 뒤질세라 밀어닥쳐 아관파천이 일어났고, 김홍집의 내각이 쓰러졌다. 이때부터 러시아와 일본의 보다 심한 세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