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느끼고 있는 자신에 대한 절망의 크기는 자신에 대한 사랑의 크기이기도 하다. 긍정적이지 못해도 괜찮다. 절망해도 괜찮다. 지금 당신은 스스로를 깨닫고 있는 과정이다. 그래서 절망하고 있는 것뿐이다.
우리는 때때로 누군가의 절망 앞에서 상대를 위로한답시고 자신이 겪은 절망과 비교하며 어떤 우월감마저 느끼려고도 한다. 한 사람의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절망 앞에 과시를 위한 위로는 서로의 관계를 영원히 엉망으로 만들고 고통은 줄어들지 않는다.
그러나 원하지 않게 들어선 인생길이라 남들보다 힘든 관문이 많다 하더라도 그만큼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가는 길이 될 것이다. 남들보다 뒤처지고 선택받지 못한 인생이라는 피해의식을 갖고 그 분한 마음에 눈과 귀를 닫는다면 국도는 정말로 멀고 느리기만 한 길일 뿐이다. 인생은 늦으면 늦는 대로 또 행운이 존재한다. 또한 인생 전체를 놓고 보았을 때는 목적지에 도달하는 시간 차이가 그렇게 많이 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무너졌기에 그 너머의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도 한다. 절망을 절망으로만 바라보지 않는 혜안도 절망 속에서 길러진다. 무너진 절망의 크기는 그만큼 넓어진 가능성이기도 한 것이다. 냉소적인 생각이 들더라도 운명에 대한 성실함을 다한 후에 질문하길 바란다.
어쩌면 모든 관문은 열쇠가 같은 자물쇠로 잠겨 있는데도 문을 통과하는 것에만 급급해, 만나는 모두를 새로운 시련이라 착각하면서 매번의 방황을 변명하는지 모른다. 살아도 언제나 제자리, 살아도 언제나 그 자리에 반복되는 인생으로 생각되어 돌아버릴 것 같지만, 우리들도 모르는 사이 어디론가 나아가고 무언가 이루어지고 있음이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본 자만이 인생을 논할 수 있다고 하지 않던가. 인생을 알아야 하기 때문에 지금을 앓아야 하는 것이다. 성장통으로 뱉어 버린 눈물로 당신의 날들이 흠뻑 젖어 있다면, 이제야 비로소 인생을 조금 알게 된 것이다. 그것은 눈물로 받는 값진 세례이다.
『절망을 걷고 있는 여행자』의 작가처럼 키르케고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절망이 불안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절망이라고 인식하는 불안이 절망이 되는 것이다. 나의 지금이 절망이라면, 내일의 희망으로 벗어나기에만 급급해하기보다는 지금의 절망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절망은 이유가 있어서 당신을 찾아왔지만 당신은 겁에 질려 숨거나 피했을 뿐이다. 우리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 마음대로 그를 절망이라고 이름 했다. 이제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